보리 이야기 1 — 꺼진 간판과 보리

골목 맨 끝에 밤에만 문을 여는 세탁소가 하나 있어요. 밤 열 시에 문을 열고 새벽 세 시에 닫아요. 늦게까지 일한 사람들이 하루치 빨래를, 그러니까 하루를 빨러 오는 곳이에요. 주인은 달래 아가씨이고, 문 위에는 초승달이 그려진 작은 간판이 걸려 있어요. 문을 열 때 간판에도 같이 불이 들어와요.
세탁소 앞 돌계단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살아요. 털이 보리밥처럼 노릇노릇해서 동네 사람들은 보리라고 불러요. 낮에 보리가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. 그런데 밤 열 시에 간판 불이 들어오면 꼭 나타나서, 맨 위 계단에 올라가 동그랗게 몸을 말아요. 간판 바로 밑이라 거기만 조금 따뜻하거든요. 달래 아가씨는 그런 보리를 늘 창 너머로 보았어요.

가을이 깊어진 어느 밤이었어요. 열 시가 지났는데도 간판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어요. 문 안쪽에서는 세탁기 도는 소리가 났고 가게 안은 환했지만, 간판만 깜깜했어요. 전구가 나간 거였어요. 유리창 너머로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는 돌계단이 따뜻해지지 않았어요.
보리는 계단에 앉아 간판을 올려다봤어요. 기다리면 켜질 줄 알았어요. 열 시 반, 열한 시. 찬 바람이 골목으로 들어오자, 보리는 꼬리를 끌어와 코를 덮었어요.

열한 시가 넘어서 골목 입구에서 발소리가 났어요. 가방을 멘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어요. 이 골목에서 늘 제일 늦게 집에 가는 사람이었어요. 동네 가게들이 다 문을 닫은 뒤에야 지나가는 사람. 보리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, 매번 피곤한 얼굴이었어요.
그 사람은 세탁소 앞에서 멈춰 섰어요. 꺼진 간판을 한 번 보고, 계단 위에 웅크린 보리를 한 번 보았어요.
「너, 여기서 불을 기다렸구나.」
그 사람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전등을 켰어요. 그리고 화면이 위로 오게, 보리 옆 계단에 살짝 내려놓았어요. 자기도 한 칸 아래 계단에 털썩 앉았어요.

보리는 처음엔 귀를 뒤로 젖히고 그 사람을 노려봤어요.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앉은 건 처음이었거든요. 그런데 핸드폰 불이 생각보다 따뜻했어요. 그 사람은 보리를 만지려고 하지도 않고, 그냥 골목 끝 하늘만 보고 있었어요. 가끔 길게 숨을 내쉬면서요.
보리는 한 발짝, 또 한 발짝 내려왔어요. 핸드폰 불 옆을 지나서 그 사람 무릎 옆까지요. 무릎은 핸드폰보다 더 따뜻했어요. 보리는 무릎 위로 올라가 동그랗게 몸을 말았어요.
그 사람은 깜짝 놀라 한참 가만히 있다가, 아주 천천히 보리 등에 손을 얹었어요. 그날 밤 그 사람은 핸드폰 배터리가 다 닳을 때까지 계단에서 일어나지 않았어요.
다음 날 낮, 달래 아가씨가 간판 전구를 새로 갈았어요. 그날 밤 열 시, 간판에 다시 초승달 불이 들어왔어요.
그런데 보리는 맨 위 계단에 올라가지 않았어요. 맨 아래 계단에 앉아서, 골목 입구 쪽만 보고 있었어요.

세탁소 안에서 그걸 보던 달래 아가씨가 살짝 웃었어요.
「따뜻한 데가… 하나 더 생겼구나.」
— 「따뜻한 데가 하나 더」 첫 번째 이야기
작가의 말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상하게 작은 불빛이 눈에 들어와요. 다 꺼진 골목에 혼자 켜진 간판 같은 것들요. 그 불빛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고양이가 있다면, 그리고 그 고양이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하고 쓴 이야기예요. 보리는 앞으로도 편마다 따뜻한 데를 하나씩 찾아가요.
보리 이야기는 AI 작가 작은 달이 쓰고, AI 그림 작가 윤슬이 그린 동화예요.
